해외여행

남녀노소 12인의 영국 유랑기 14

coaowo 2024. 9. 15. 02:43

14. 기억이 우리의 미래를 만든다

어젯밤 야식과 정산을 마치고 오랜만에 늦은 시간에 잠이 들었다. 영국에 온 이래로 항상 빡빡한 일정 속에 눕자마자 잠들곤 했는데, 마지막 날이어서 그런지 서로 어디 다녀왔는지 얘기도 오래도록 나누고 런던의 긴긴밤을 보내기 아쉬워하며 한동안 서성거렸다. 명옥쌤은 정말 피곤하셨는지 우리가 불도 안 끄고 떠드는데 아주 깊은 잠에 드셨다. 다들 체력의 한계가 오긴 온 모양이다. 나도 처음으로 이제 집에 갈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긴 했다.

하지만 어김없이 아침은 찾아 옵니다
점점 늘어가는 침대 요정들

은정언니, 명옥쌤과 조식을 먹으러 출동. 여전히 우리는 6파운드짜리 조식(빵과 과일, 요거트)만 먹을 수 있는데, 언니와 줄을 서다가 나도 소시지 먹고 싶다고 장난을 쳤다. 근데 이게 웬걸! 직원이 내 말을 알아들은 건지, 소시지를 향한 간절한 눈빛을 본 건지! 원하는 걸 그냥 주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이렇게 땡큐일 수가… 보통 사람이면 부끄러워할 수도 있지만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좋아하고 원하는 걸 떠 왔다! 직원언니 최고… 유 메잌 미 해피…💕(그래도 양심상 하나씩만 달라했다)

소시지 하나로 넘나 해피해피한 아침

점심을 든든히 먹고 나갈 준비를 하는데… 캐리어 상태가 말이 아니다. 나 원래 이런 사람 아닌데…💦이제 집에 갈 짐을 정리해야 했는데 일단 모른척하고 나가기로 한다.
오늘은 공식일정 마지막 날이기 때문에 각자 못해본 일들을 하기 위해 흩어졌다. 정은쌤은 셰익스피어 생가로 아라, 은총, 기주는 내셔널갤러리로, 또 누군가는 숙소에서 휴식을, 또 누군가는 쇼핑을 떠났다. 나는 오기 전부터 근위대 교대식을 꼭 보고 싶었기 때문에 약간 떨리지만 혼자 도시 여행을 떠나보기로 했다.

승리가 요즘 Mz머리라고 머리를 네 갈래로 따줬다. 내가 최고 멋 부릴 때 쓰는 비니도 쓰고 힙하게(?) 길을 나서본다. 원래라면 10시까지는 버킹엄 궁전 앞에 가야 하지만 있는 대로 늦장을 부려서 부랴부랴 숙소를 나셨다. 아직 숙소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명옥쌤이 날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용돈을…!! 왠지 오늘 행운의 복돈이 될 것 같은 예감💕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혼자서 버스도 잘 타고, 나에게 길 물어보는 사람들도 잘 상대해 주고. 아주 기분 좋은 아침이야.
버스에서 본 어떤 사람의 가방. 하지만 난 이렇게 팔팔하게 살아있는데요? 주말이라 그런지 버스에 사람이 아주 많았다. 30분 정도 버스를 타고, 또 10분 정도를 걸어 버킹엄 궁전 앞에 도착했는데… 이렇게 사람이 많을 줄이야.

저 동상 위에까지 사람들이 올라가 인산인해였고 궁전 바로 앞은 더 많았다! 인기가 장난이 아니구나… 그래도 나 하나쯤 볼 자리는 있겠지 하고 인파 속으로 끼어들었다.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성문 앞으로 파고들었는데, 키 큰 소년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어서 키 작은 나는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별 수없이 소년의 겨드랑이 사이로…

장난감 병정 같은 옷을 입은 근위대가 계속 왔다리 갔다리 하고 있다. 내가 도착한 시간이 10시 40분쯤이었는데 (11시에 시작) 진짜 앞자리를 잡고 싶으면 늦어도 한 시간 전에는 도착해야 할 듯.
어떻게든 비집고 보고 있는데, 웬 꼬마숙녀가 앞으로 파고들더니 성문을 잡고 등반을 시작했다. 그나마 겨드랑이 틈으로 보던 시야마저 완전 가리며! 이걸 쥐어박을 수도 없고… 이 꼬마가 파고들기 시작하니, 동생꼬마도 슬슬 앞으로 끼어들기 시작했다. 웁스…

하지만 난 의지에 한국인. 꼬마가 경찰한테 걸려 잠시 밑으로 내려온 사이… 나도 벽을 타고 올랐다!
그래서 이런 사진을 건질 수 있었지. 후들거리는 팔로 버티고 보다가 결국 나도 경찰한테 혼났지만 사진은 건졌고요.

근위대가 서비스로(?) 문 앞에 한번 와줬다

인파에 기가 다 빨려 다시 버스를 타러 가는데… 아뿔싸! 보조 배터리를 안 가져온 걸 이제야 알았다. 오늘 하루종일 밖에 혼자 있어야 하는데… 할 수없이 은정언니에게 sos를 치고 숙소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버스에서 어떤 한국인부부가 이야기 나누는 걸 들었는데, 한국인만 보면 말 거는 병이 발동해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하지만 부부는 예상보다 배타적이었고… 모든 한국인이 여행지에서 한국인을 반기는 건 아니구나 싶어 입을 다물고 혼자 조용히 동네로 돌아왔다.

근데 버스에서 이 꼬마들을 또 만남

테이트모던을 구경 중이라는 은정언니를 급하게 불러와 같이 점심을 먹었다. 이날 꼭 파스타가 먹고 싶어서 초밥을 먹겠다는 언니를 굳이, 굳이~~~ 불러서🤣🤣
주문도 (많이) 어렵고 양도 정말 적은 집에서 먹은 파스타. 심지어 가격도 비쌌지만! (인당 삼만 원꼴) 맛있었으므로… 생각해 보니 여기 와서 파스타를 한 번밖에 못 먹었다.

밥 먹다가 갑자기 꿀벌 대소동. 벌 한 마리가 계에속 음식 주변을 날아다녀서 결국 자리를 박차고 도망쳤다. 우리가 난리법석이자 주인이 와서 쫓아주었다.🐝 벌은 맨체스터로 충분하단다.

요란했던 점심을 다 먹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 배터리를 챙겼다. 언니는 두 시 반에 위키드 공연을 예약해 두었는데, 아주 약간 시간이 남아서 세인트 폴 성당을 구경했다. 내부 사진은 못 찍지만 한 번쯤 볼만한 곳이다. (평일에는 관람 요금이 있음) 언니 버스 타기 전에 자라에서 옷 구경도 쓰윽해주고…

언니와 빠이하고 나는 북마크 해두었던 서점을 향해 걸었다. 사실 오늘 근위대 교대식 말고는 딱히 계획해 둔 게 없어서 슬슬 뭘 해야 할지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여행 와서 이렇게 어영부영 시간 보내는 걸 제일 싫어한다. 서점에 제발 볼거리가 많길 바라며…

소품은 별로 팔지 않는 순수 서점이었는데, 여행전문 서점이어서 그런지 나라별로 코너가 있었다. 일본이 두 칸이길래 우리나라는 어쩐가 봤더니 중국과 같은 칸인 것도 모자라(중국은 옆에 세 칸 더 있음) 심지어 우리나라 책은 있지도 않았다! 이런 정나미 떨어지는 서점 같으니라고…

서점에서 나와 카페 가서 일기나 쓸까 하다가 그러기엔 시간이 아까워 전에 들었던 비틀즈 스토어에 가기로 했다. 리버풀로 여행을 같이 온 일행들이 하나같이 극찬을 하고, 거기서 산 비틀즈 굿즈를 자랑했었는데, 난 사실 비틀즈에 관심은 없지만… 은정언니에게 뭐라도 사다 줄까 싶어 다녀오기로 했다.

숙소에서 약 한 시간 거리. 지하철을 타러 골목골목을 혼자 지나는데 어떤 양복 입은 아저씨가 내게 고함을 질렀다. 어찌나 크게 소리치던지 골목이 다 울릴 정도였다. 덕분에 심장이 떨어지는 경험을 했다..^^ 이게 인종차별인가? 뭐 큰일이 있던 건 아니라 오히려 잠도 깨고 머리에 도파민이 돌아서 이거 고맙다고 전해야 할지… 하지만 내림 놀랐었는지 지하철을 거꾸로 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어야 했다.

지하철도 혼자 잘 타요 쏘 -이지!

베이커 스트릿역에서 내려 5분 정도 걸으면 비틀즈 스토어를 만날 수 있다. 역시 가게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붐볐다. 안으로 들어가면 각종 비틀즈 관련 굿즈들이 판매 중이다. 옷과 마그넷 기타 등등… 명옥쌤이 기타 줄을 부탁하셔서 하나 사고 (뭐가 기타 줄인지 몰라 두 번이나 이게 맞냐고 물어야 했다. 은정언니에게 뭐 하나라도 꼭 사다 주고 싶었는데 아쉽게 리버풀에 파는 굿즈가 하나도 없었다.🥲다른 마그넷이라도 살까 하나가 별로 예쁜 게 없어 그냥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바로 옆 셜록 뮤지엄. 하지만 셜록은 전혀 모름

한 시간이 걸려 왔는데 그냥 가기는 너어어어무 아쉬웠다. 그래서 근처에 그 유명한 애비로드를 가기로 했는데.. 걸어서 35분 거리. 아직 날고 밝겠다 날씨도 좋겠다, 한번 걸어보기로 한다! 혼자 인적도 드문 거리를 걷는데 전혀 무섭지 않다. 약간 힘들긴 했는데 흥얼흥얼 거리며 익숙한 거리를 걷듯이 걸었다. 이런 게 여행이지, 혼자 걷기도 하고 헤매기도 하면서…

하지만 내 안에 어떤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는 했다. 애비로드에 가도 별게 없을 것 같다는 예감…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비틀즈가 녹음을 했던 작업실 앞 횡단보도였는데, 일단 도로라서 멈춰서 사진을 찍을 수가 없고 무엇보다 목숨 걸고 나를 찍어줄 일행도 없다.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도 아니어서 차가 안 올 때 3초 정도 도로에 뛰어들어 찍어야 했는데, 나에겐 불가능하니 5분 정도 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30분 왜 걸었지?)

다시 버스를 타러… 버스정류장에 뭔지 모를 청자켓이 걸려있다. 누가 놓고 갔을까? 애기옷 같았는데. 20분 정도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고… 2층에 앉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이 낯선 여행지 버스에서 자다니 많이 편해졌나 보다.
하지만 너무 편해졌는지 정말 엉뚱한 곳에 내려 길을 헤매기 시작했다.

그러다 만난 갤러리. 그림도 판매 중이었는데 너무 비싸 살 수는 없었다. 갤러리에서 나와 한도 끝도 없이 걸었다. 그러다 어찌어찌 테이크모던 앞까지 굴러왔다. 역시 길은 가고자 하는 이에게 열리게 되어 있으니…

템즈강 따라 걷기

은정언니가 아까 잠시 전시를 봤다고 했던 게 생각나 들어가려는데, 입구에서 어떤 시위대를 만났다. 나체입줄 알고 깜짝 놀랐는데 다행히(?) 살색 옷을 입고 있었다.
“Fishing is not human(e)” 낚시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적이지 않다) 동물권 관련 시위 같았는데, 우리가 보통 동물권 이야기를 할 때 네발 가축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하지 어업에 대해서는 사실 잘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대단히 새로운 시각이라 생각했다. 이 시위보다 더 놀란 건 어떤 무리의 인간 놈들이 햄버거 같은 걸 먹으며 이 시위대를 조롱하고 있었다! 웁스… 이 퍼포먼스의 완성을 이 방해꾼들로 완성 됐다고 봐야 한다. 하여튼 세상에 별 루저 같은 놈들이 여기나 저기나 너무 많다.

일단 들어가자마자 소품샵이 있길래 야무지게 구경해줬다. 알록달록 사고 싶은 게 많았는데 생각보다 가격이 조금 있어 살포시 내려놨다. 명옥쌤께 아침에 용돈도 받았는데 작은 거라도 선물할 게 없을까 열심히 돌았지만 소득은 없었고…

테이트모던의 전시를 무료라길래 들어가 봤는데 기대이상으로 규모가 정말 크다! 꼼꼼하게 다 봤으면 몇 시간은 걸렸을 것 같다.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함께 전시 중인 것 같았는데… 그 의미를 다 알 순 없지만 굉장히 훌륭한 수준의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제일 인상깊은 작품

슬슬 저녁 약속이 시간이 다 돼서 밖으로 나왔다. 강변에 우두커니 앉아 언니들과 기주를 기다린다. 오늘 뭔가 알차게 흘러가지 않은 것 같아 사실 이때 기분이 안 좋았다. 하지만 여행기를 쓰고 있는 지금 돌이켜보니… 🐶바빴잖아?? 한시도 쉬지 않고 걸었고만… 이런 알찬 여행 강박에서 좀 벗어나야 한다.

여기도 이제 마지막이란 생각해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언제 또 템즈강을 바라보며 시간을 흘러 보내겠나.
조금 있다가 기주와 씸언니가 달려왔다. 왜 달려왔냐면 화장실을 향하여! 은정언니는 우리 먹을 간식을 사러 갔다. 내가 기다린 김에 사둘걸…

이 공연표도 은정언니가 아침부터 미리 가서 끊은 표. 모두가 엄청 궁금해했던 글로브극장에서의 ’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먼저 보고 온 쌤들이 극찬을 하셔서 나도 굉장히 기대가 된다.

피자를 사러 간 은정언니를 기다리며 잠깐 소품샵 구경. 셰익스피어 그 자체를 상품화했다. 작품이 아니고 작가를 상품화하다니, 그~렇게 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지우개가 귀여워 두 개 정도 사고.

드디어 글로브 극장 입성! 두근두근 입장할 때가 제일 설렜다. 우리는 단돈 5파운드짜리 스텐딩 표를 구매했는데, 두 시간 반짜리 연극을 서서 볼 생각을 하니 벌써 다리가 후덜덜 떨렸다. 사실 너무 힘들면 주저앉아야지 했는데…  장내를 돌아다니는 직원이 앉으면 일어나라고 못 앉게 한다.

너무나 멋진 극장. 공연 시작전이나 쉬는 시간에나 앉을 수 있다. 극장이 황홀해서 빠져보다가, 다리가 아파 욕을 하다… 왔다리 갔다리 하는 이 마음.

비싼 표를 사면 앉을 수 있긴 하다. 정말 자본주의적인 공연장이다. 당연한 거 일수도 있지만. 예전에도 이렇게 엄격하게 했을까? 앉으면 막 채찍을 휘두르며(절대 아님)

앉을 수 있을때 최선을 다해 앉아야 한다

1부 공연이 끝나고… 밖으로 나와 은정언니가 사 온 피자를 먹었다. 토핑도 없는 피자지만 너무 지쳐서 인지 맛있었다. 씸언니는 무릎이 아파 극 초중반에 포기하고 나갔는데, 언니가 잘한 선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약 3초 정도… 20분 정도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고… 다시 고행의 홀로 들어갔다. 2부 공연이 더 길게 남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면 공연 자체로 정말 센세이널한 공연이었으므로…
1. 셰익스피어가 운영하던 극장에서
2. 두 시간 반동안 스탠딩으로
3. 주인공이 흑인 클레오파트라인데
4. 수어를 사용한다!
다시 태어나도 이런 여러 가지 의미로 엄청난 공연을 만나기 힘들 것 같다. 영어 공연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배우가 수어를 사용하므로 영어 자만이 동시에 켜졌는데, 자막 보랴 무대 보랴 정신이 더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흔히 pc주의,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해야 하나… 요즘 한국에서도 대단히 화두인 문제인데, 작품을 작품으로만 보고 관객이
이해를 힘들어하니 별로인 작품이다!라고 해야 할지… 주로 비장애인 배우만 연극무대에 장애를 가진 배우가 슨 자체로도 의미 있는 공연이라 해야 할지.

공연을 보고 바로 옆에 펍 (첫날 갔던 셰익스피어의 단골 펍)에 가서도 한참을 이야기했다. 이 연극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요?

이 와중에 배는 고파서 스테이크를 시켰다.
하루종일 걷고 헤매고 심지어 서서 공연까지 보느라 텐션이 완전 바닥이었는데, 또 여럿이서 템즈강변에 앉아 있으니 기분이 다시 좋아진다. 오늘 마지막 런던의 밤인데, 다운돼 있기는 너무 아깝잖아!

나중에 오늘을 떠올리면, 나는 분명 너무나 좋은 날이었다고 하겠지. 설령 그다지 좋지 않은 날이었어도.
그렇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우리의 여행도 저물어간다. 이제 우리 함께한 이 날들을 어떻게 기억할지, 고르고 골라 적어 내릴 순간이다. 너어무 좋았던 기억도, 죽도록 힘들었던 기억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휘발되겠지만… 오늘의 이 감각들만이 남아 또 내 안에 우리 안에 차곡차곡 쌓여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잊더라도 떠나고, 버릴 줄 알더라도 하나라도 붙잡아 두려하겠지.